다다이즘(다다, Dada)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예술 운동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 입체주의, 구성주의, 표현주의와 같은 모더니즘 운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다 예술은 공연, 사진, 회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손을 뻗쳤다. 물질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특징을 가진 다다의 미학은 베를린, 파리, 뉴욕, 쾰른 등 많은 도시 예술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운동은 초현실주의의 등장과 함께 소멸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현대 예술의 초석이 되었다.
주요 특징
다다이즘은 개념 미술 운동의 전신이었다. 다다 예술가들은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부르주아적 감성에서 벗어나 현대 사회에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할 작품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두었다.
한스 아르프(Hans Arp) 와 같은 다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 ‘우연’의 요소를 점목시키려고 했다. 이는 밑그림부터 철저하고 꼼꼼하게 계획해서 완성작품을 만들어내는 전통 예술 제작의 규범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다다이스트는 작품에 우연의 요소를 도입해 전통 예술의 규범에 도전하고, 이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다 예술가들은 ‘레디메이드’로 유명하다. 레디메이드란 예술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일상의 물건을 그 자체로 예술 작품으로 선보이는 것이다. 이같은 기성품의 사용을 통해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에서의 창의성은 무엇이고,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다다이즘의 시작
스위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어느 한 쪽의 편도 들지 않은 중립국가였다. 이러한 스위스 취리히에서 1916년 2월, 휴고 볼과 에미 헤닝스는 ‘카바레 볼테르’를 설립한다. 볼은 젊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같은 이름의 보도자료를 낸다. 보도자료의 내용은, 카바레 볼테르가 예술가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며, 손님들은 와서 음악 공연과 낭독을 하게될 것이고, 취리히의 젊은 예술가들은 성향에 상관없이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모임에는 한스 아르프, 트리스탄 차라, 마르셀 얀고 등이 참여한다.
그리고 그 해 7월, 카바레에서 첫 번째 ‘다다’의 모임이 열린다. 아 ‘다다’라는 용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리차드 힐센벡이 칼을 사전에 무작위로 찔러 그 이름을 정했다는 것이다. ‘다다’라는 용어는 목마를 뜻하는 옛 프랑스어다. 어린 아이가 처음 하는 말을 뜻하기도 한다. 유치하고 얼핏 부조리해보이는 이 용어는 전통사회의 합리성과 침착함, 진지함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아무 성향도 내포하지 않고 무의미에 가까운 단어라는 것도 ‘국제주의자’를 공언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다다 예술의 목적은 전쟁을 종결하는데 도움이 되고, 전쟁의 원인이 된 민족주의와 부르주아 관습에 대한 분노를 발산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정치적 집단이나 이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권위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앞장섰다.
다다이즘의 확산
취리히의 다다이스트들은 잡지를 발행했고, 그들의 반전 메시지를 퍼뜨리기 위해 전시회를 개최했다. 1917년 휴고 볼이 베른으로 떠난 후 차라(Tzara)는 반호프스트라세에 다다 미술관(Glaerie Dada)를 설립했다. 차라는 다다 운동의 지도자가 됐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한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편지를 나누며 다다 사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들은 ‘다다’라는 제목으로 예술 및 문학 리뷰 서적을 출판했다. 다다이즘 운동은 공연과 인쇄물에 집중됐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쯤 많은 다다이스트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다다 운동의 메시지를 퍼뜨렸다. 취리히 다다이즘을 처음 시작한 인물 중 한 명인 리차드 힐센벡은 이 운동을 독일 베를린에 전파했다. 베를린에서 다다는 좀 더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이에 참여한 독일 예술가로는 라울 하우스만 , 게오르게 그로스 , 요하네스 바더, 오토 슈말하우젠, 빌란트 헤르츠펠데, 하트필드 형제 등이 있다. 이들은 하나의 인쇄된 메시지와 사진 조각으로 구성된 포토 몽타주 기술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 기술은 하트필드의 반나치 작품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됐다. 취리히에서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의 예술가들도 공개 집회를 열었는데, 그들의 익살스러우면서 반사회적으로까지 보이는 행동은 일반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첫 번째 독일 다다 선언문’과 같은 다다 인쇄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1920년 6월에는 독일에서 제1회 국제 다다 박람회가 열렸다.
주요 작품
Fountain,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선보인 첫 번째 다다 예술가였다. 그가 이 작품을 처음 선보였을 때 일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료 다다 예술가들도 불쾌함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소변기를 뒤집어 허구의 서명을 한 것 이외에는 다른 예술적 조작이 없다. 소변기를 그것이 있어야 할 일상적인 환경으로부터 떼어내어 예술적인 배경에 놓음으로써 뒤샹은 보는 이들에게 예술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예술의 기본적 정의를 묻고 있다. ‘분수(Fontain)’라는 제목은 뒤샹이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설계된 유명한 분수와 이 소변기가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이같은 뒤샹의 대담함은 전통 예술의 가치에 도전하는 다다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후기 20세기 예술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