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카라바조의 작품에서는 극적인 강렬함과 내면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폭력적이고 격동적인 삶이 반영된 결과다. 그는 살면서 수많은 범죄에 연루되었고, 그중에는 심지어 살인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탐구해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뚜렷한 빛의 대조를 통해 작품의 극적인 효과를 최대로 끌어 올렸고, 종교적인 인물을 현대적인 옷을 입혀 현대적인 배경에 배치하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그리고 따로 밑그림을 준비하지 않고 모델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찰에 키아로스쿠로 조명의 사용을 결합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비록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나 그의 작품은 후기 바로크 예술, 특히 19세기 리얼리즘 사조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카라바조

초년의 삶

카라바조는 1571년 대천사 미카엘의 축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페르모와 루시아가 그의 이름을 미켈란젤로라고 지은 이유다. 아버지인 페르모는 석공이었고, 어머니인 루시아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스포르차 가문의 대리인으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카라바조’라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시골집에서 살았는데, 이것이 그가 카라바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밀라노에서 화가 시모네 페테르자노 수하의 수습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밀라노에서 보낸 초기 작품 중 일부는 초상화와 정물화였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는 페테르자노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상관없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준비 스케치를 그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에서의 삶

그가 11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자 가족의 재산은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고루 나뉘었다. 그는 물려받은 땅을 팔아 번 돈을 십 년 만에 모두 써버렸고, 충동적으로 로마로 이주했다. 21살의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판돌포 푸치와 함께 지냈다. 카라바조는 몇 달 후 푸치의 집을 떠나며 그에게 ‘인사라타(Monsignor Insalata, 샐러드 아저씨)’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푸치가 주로 샐러드로 구성된 빈약한 음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후 카라바조는 당시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었던 주세페 세라리의 작업실에서 일하게 된다. 주로 꽃과 과일 등 정물을 그리는 일을 도맡았다. 작업실에서 일이 모두 끝나갈 때쯤 그는 술의 신이 노란 포도 한 다발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젊은 병든 바쿠스’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 당시 카라바조 자기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도 알려졌다. 이 시기 그는 젊은 나이었지만 매우 아팠고, 병원에서 수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카라바조는 코스탄티노 스파타라고 하는 예술품 상인을 통해 그의 주요 초기 후원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났다. 추기경이 사들인 카라바조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메두사(1597)’다.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갤러리에 걸려있는데 이 작품은 목이 잘린 메두사의 머리를 자화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망명

1606년 그는 로마를 도망쳐나왔다. 라누치오 토마소니라는 이름의 젊은 포주와 싸우다 홧김에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사형 영장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잡히지 않기 위해 로마를 빠져나왔다.

로마에서 도망쳐나온 후 처음에 그는 자가롤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몇 달을 보냈다. 그는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친구인 공작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후기 작품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엠마우스에서의 만찬(1606)’을 그렸다. 흙빛 팔레트에 그려진 이 그림은 여관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예수와 그를 알아보지 못한 두 명의 추종자를 묘사한다. 작품 속 드라마를 상당히 절제된 스타일로 표현하고 있고, 그림 속 빈 공간도 인물들 만큼 중요하게 그려져있다.

이후 카라바조는 나폴리로 이주했다. 3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총 4년간 이어졌던 망명 기간 동안 그는 교황으로부터 죄를 사면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교황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중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그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냈다. 그 중 하나가 ‘골리앗의 머리를 가진 다비드(1610)’인데, 교황의 조카이자 카라바조의 그림을 좋아하는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을 위한 선물이었다.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에서 골리앗의 얼굴은 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카라바조의 죽음

그가 왜 죽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1610년 배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망 원인도 확실하지 않다. 매독, 말라리아, 브루셀라증 등이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그가 몰타에서 폭행한 기사가 보복으로 그를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모두 그가 죽은 후에 알려진 것이라 100%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는 그의 스타일과 살아있는 모델을 사용하는 리얼리즘 기법은 17세기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로마에 거주하는 외국 화가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있었다. 그의 작품을 모방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이들을 통해 그의 회화 양식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고, 특히 바로크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카라바조의 영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그의 영화 ‘Mean Streets’을 제작하며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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