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Rococo, 1702~1780)

로코코는 정교한 장식과 복잡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귀족주의 예술이다. ‘로코코’라는 용어는 장 몬돈(Jean Mondon)이 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 용어는 프랑스어 ‘rocaille’에서 파행됐는데, 이는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분수나 정원의 세밀한 장식을 위해 사용된 조개 세공, 조약돌 세공 등을 의미하는 단어다.

화려한 쇼를 뜻하는 ‘블링’이란 단어가 나오기 수 세기 전 등장한 이 운동은 유럽 예술계 전반에 귀족적 이상주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 시대의 상징적인 그림들은 귀족의 생활방식과 과거 시대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그려졌다. 1700년대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18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며 장식과 미술의 초호화 결합을 탄생시켰다.

로코코

주요 특징

로코코 시대에는 대담한 삶의 욕망과 쾌락을 작품에 녹여내는 게 특징이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종류의 풍속화가 그려졌다. 대표적으로 ‘축제 갈란테’ 즉, 야외에서의 오락 활동을 묘사한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이 외에도 에로틱한 그림, 아르카디아의 풍경, 평범한 시민들의 눈길을 끄는 역사적 또는 우화적 인물에 ‘유명인’의 초상을 대입한 작품 등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로코코 미술과 건축은 무대 디자인의 영향으로 연극성과 드라마성을 강하게 내포한 게 특징이다. 디자인 자체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회화와 기타 장식물을 다양한 환경 속에서 엮어내는 혁신적인 방식은 연극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대에는 세부적인 장식 작업이 번성했다. 건축물에 예술적 감각을 녹여내기 위해 사용된 가장 방법들에는 비대칭적 패턴(틀로서의 스투코 부조, 모티프와 두루마리 작업 등), 아라베스크의 조각 디테일, 금박, 파스텔 등이다.

로코코 디자인 시대

로코코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1701년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의 개인 아파트를 설계 때부터였다. 이를 디자인한 Le Pautre는 하얀색 벽과 천장에 S자 또는 C자 모양의 곡선을 사용하는 아라베스크 디자인을 사용했다. 그는 또 나무 패널에 금박을 입히는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는 장식 디자이너보다 ‘오르네마니스트(ornemaniste)’로 불리곤 이는 당시 화려한 장식 디자인을 개발하는 장인과 공예가가 상당히 인기 있는 직업이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였다. 막대한 부와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평화가 이어지자 프랑스인들은 사회에서 개인으로 눈을 돌렸다. 개인의 문제와 세속적 쾌락이 큰 관심을 끌었다. 루이 14세가 죽고 나서 왕위를 이은 루이 15세도 이 양식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후원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유럽 궁정 전역에 로코코 양식이 전파됐다.

프랑스의 로코코

로코코 운동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시대에는 ‘살롱(Salon)’ 디자인이 번영했는데, 귀족의 궁전에 방문한 손님들을 대접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가장 유명한 살롱은 ‘샤를-요제프 나토아르’ 살롱과 독일 보프랑의 ‘라 살롱 드 라 프린세스’였다. 하얀 벽돌로 지은 원통형의 내부, 금박이 칠해진 나무, 수많은 거울은 살롱의 화려함을 극대화했다. 조개껍데기나 아칸투스 프론드와 같은 유기체의 형태에서 파생된 비대칭 패턴은 살롱의 로코코 디자인에 영향을 줬다. 장식을 최대한으로 강조하는 프랑스의 살롱 디자인은 이 운동의 초석이 됐다.

회화는 이 운동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프랑수아 부셰의 뒤를 이어 이 운동을 이끈 유명 화가인 앙투안 와토는 인테리어부터 태피스트리, 패션까지 디자인의 모든 요소에 로코코 양식을 도입했다. 이 외 유명 화가로는 장 밥티스트 반 루, 장 마르크 나띠에, 프랑수아 르모인 등이 있다. 르모인은 베르사유 궁전의 ‘헤라클레스의 천장’에 ‘헤라클레스 숭배(1736)’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그린 대표적인 역사적 우화로 유명하다.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많은 유명 화가는 그들의 작업장에서 일관된 양식과 주제를 유지했다.

이탈리아의 로코코

이탈리아의 로코코 운동은 회화 분야, 특히 베네치아 학파에서 이끌었다. 베네치아의 화가 티에폴로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티에폴로는 천장화에 베네치아 학파의 색상 강조 기법을 사용해 프레스코화와 대형 제단화를 제작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되는데, 특히 독일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의 천장화 시리즈,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의 스페인 군주제 신격화를 작업하는 등 주로 왕실의 의뢰를 많이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뷰 페인터’로 알려진 위대한 풍경 예술가들, 특히 일명 ‘카날레토’로 알려진 지오바니 안토니오 캐널이 유명했다. 그는 베네치아 운하와 미인대회의 인기 장면을 그리면서 2점 선형 원근법을 사용했다. 그의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트(1740년경)’와 같은 작품은 특히 영국 귀족에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젊은 영국 귀족들이 유럽 곳곳의 명소를 관광하며 서양 문화의 고전적인 뿌리를 배워가는 ‘그랜드 투어’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랜드 투어는 일종의 ‘귀족 관광’이었고, 베네치아는 특히 그림 같은 경치와 쾌락적인 축제 분위기로 유명한 인기 관광지였다. 이 젊은 영국 귀족들은 예술 수집가이자 후원가이기도 했다. 카날레토의 작품 대부분은 영국 귀족들에게 팔렸다. 그리고 그는 1746년 영국 예술 시장에 가까워지기 위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10년동안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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