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시작된 낭만주의는 1800년경 문학평론에서 미학으로 처음 정의됐다. 프랑스와 영국의 예술 운동으로서 21세기 중반까지 활발하게 진행된다.
낭만주의의 시작
인간의 상상력과 감정에 초점을 맞춘 이 운동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전개된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비록 신고전주의의 반대에 위치하지만 초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대표적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화실에서 훈련했다. 앙투안 장 그로스 남작, 안 루이 지로데-트리오손, 그리고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잉그레스 등이 대표적이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양식의 흐릿한 경계는 잉그레스의 ‘호메로스의 아포테오시스’와 외제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 1927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이다. 잉그레스의 작품은 무질서한 들라크루아의 작품과는 다르게 다비드의 질서 있는 신고전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작품 모두 낭만주의의 핵심 개념인 예술가의 독창성을 주장하고 있다.
자연
낭만주의는 자연의 힘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이 운동은 자연을 자연의 통제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큰 힘을 이용해 계몽주의 사회에 대안을 제시했다.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하고 무서운 자연의 이미지는 18세기의 ‘숭고 미학’을 떠오르게 한다. ‘숭고 미학’이란 1700년대 중반 영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와 프랑스 철학자 데니스 디드로가 ‘영혼을 놀라게 하고 공포감을 심어주는 모든 것은 숭고함을 이어준다’라고 주장한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18세기 말~19세기 초 회화에서는 난파선 이미지가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경이로운 자연의 힘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을 표현한 것이다. 난파선 장면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ericault)의 ‘메두사의 뗏목’으로 절정에 달한다. 소름끼칠 정도의 명쾌함, 정서적 강렬함, 영웅의 부재가 특징인 이 작품은 낭만주의 스타일의 상징이다. 또한 터너(JMW Turner)는 1812년 알프스를 건너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의 모습을 그리며 군대가 대자연에 압도되고 눈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장면이 묘사했는데, 낭만주의 예술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을 듣는다.
자연을 바라보는 이 양식의 또다른 태도는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풍경화에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모국인 영국 시골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솔즈베리 대성당’이다. 성당의 실물 크기의 스케치를 그렸다. 그는 이 스케치에 ‘당시 당신의 한 가지 마음상태’를 나타낼 뿐이라고 적었다. 1824년 파리 살롱전에 그의 풍경화가 출품되자 많은 비평가와 예술가는 이를 ‘자연 그 자체’라고 평했다. 이처럼 그의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자연관은 이 양식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개성’이라 볼 수 있다.
초상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낭만주의의 초상화에 반영된다. 이 양식의 화가들은 다양한 심리적 감정적 상태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개인의 초상을 ‘기록’했다. 화가 제리코(Gericault)는 정신병 환자의 초상화를 그리며 정신 질환의 극단적인 면을 탐구했으며, 아이들을 파격적으로 묘사해 어린 시절의 어두운 면을 연구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Alfred Dedreux’는 5~6세 정도의 어린 소년의 초상화인데, 작품 속 아이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매우 진지하며 어른처럼 보이기도 하다. 배경에 그려진 어두운 구름은 어린 시절의 불안함을 묘사한다.
동물
인간의 감정상태에 대한 낭만주의의 탐구는 동물계까지 확장된다. 자연의 힘과 인간의 행동을 동물에 대입해 묘사했다. 이는 Delacroix, Antoine-Louis Barye 및 Edwin Landseer와 같은 예술가들이 그린 야생동물 스케치에서 볼 수 있다. 1820년대 파리와 런던의 동물원에서 그린 스케치다. 제리코는 경주마에서 일하는 말까지 모둔 품종의 말을 그리기도 했다. ‘메이즈파(야생마에 묶인 바이에른경 이야기)’는 들라크루아부터 테오도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사로잡은 소재였다. 그들은 이 이야기에 담긴 폭력성과과 강렬함을 좋아했다.
주요 작품: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 고야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스페인 시민들이 공개 처형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의 왼편에는 언덕을 배경으로 불이 타오르고 있고, 흰색 셔츠를 입은 남자는 무릎을 꿇고 총을 든 군인을 향해 팔을 들고 있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감정에 북받친 표정을 하고 그의 주위에 모여있다. 그들 발밑에는 시체가 쌓여있다. 그들의 오른쪽엔 다음이 자신들의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림의 오른 편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덩어리를 형성하며 스페인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커다란 사각형의 조명은 군인과 희생자 사이의 장면을 나누고 있다.
이 작품은 전통적 종교 모티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의 팔은 마치 십자가 모양으로 뻗어있다. 그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손바닥에 십자가 모양의 표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범한 개인이 경험한 사건에 대한 묘사는 신고전주의의 역사화적 규범을 뒤집었다고 할 수 있다. 고야는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이어진 나폴래옹 군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그림 속 어두운 지평선은 처형이 일어난 시간이 이른 아침 시간임을 알려주면서 어둠의 압도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이 작품을 ‘주제, 스타일, 메시지 등 모든 면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그림’이라고 추켜올렸다.